취미활동/끄적끄적
2008-07-10 13:59:45
잘 알고 지내는 태환 형을 만나 아주 오랜만에 저녁식사를 같이 하면서 소주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같은 과테말라시에 살면서도 몸담고 일하는 분야가 서로 틀리기 때문에 자주 만나기가 어렵지만 태환 형과는 웬일인지 오래된 친구와 같은 편안한 느낌이 들어 가끔씩 만나더라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형은 15년 전에 과테말라에 혈혈단신으로 와서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자수성가하여 이제는 번듯한 봉제공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1남 1녀의 아이들에게 가정교육을 잘 시켜서 비뚤어지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키우고 있다.
사건과 사고를 주로 다루는 일간지 Nuestro Diario 의 표지는 거의 매일 총에 맞아 죽거나 버스가 굴러 사상자가 발생한 뉴스들로 가득하다. 과테말라에서는 매일 16명이 총에 맞아 죽으며, 4명 정도가 실종되는데 이들도 대개 시체로 발견된다고 하며, 유엔 개발기구의 통계에 따르면 2007년에 5,781명이 살해되었다. 최근 2007년 말의 과테말라 대통령 선거와 2008년 1월 14일에 있었던 Colom 대통령이 취임하는 정권 이양과정을 틈타 범죄조직이 기승을 부리는 등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으며, 한동안 잠잠하던 우리 동포사회도 이러한 범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어서 동포들 사이에 이에 대한 우려가 높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사진 : 한 식당에서 근무하는 경비원. 치안이 좋지 않아서 거의 대부분 공공장소에는 사설 경비원이 실탄이 든 총을 들고 경비를 선다.
태환 형은 우리 교민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법 상세히 알고 있고, 과테말라의 정치나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서 형과 이야기 하면서 내가 모르는 사실들을 많이 듣게 된다. 내가 과테말라 의회가 사형제도를 통과시켜서 Colom 대통령이 유럽국가들로부터 압박을 많이 받는다는 언론 이야기를 꺼내자 형은 대뜸 목에 핏대를 세웠다.
“중세에 무고한 시민들을 마녀사냥 했었고, 중남미에서 수 많은 원주민들을 무차별하게 죽인 놈들이 지금 여기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줄 알지도 못하면서 밥 벌어 먹으려고 떠드는 인권단체 놈들의 말에 놀아나? 그래, 범죄자들의 인권은 중요하고 매일 무고하게 죽어가는 20여명의 생명과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는 시민들의 인권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단 말이야?”
“형, 사회는 계속 발전해야 하는 거고, 유럽도 어둡던 중세시대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그 동안 국민들의 인권문제가 많이 개선되어 왔지 않았겠어? 세계 인권단체가 인권침해가 이루어지는 국가에 압력을 가하면서 여러 나라들의 국민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해.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미국 등 여러 나라들이 과거 군부독재 시절에 정치인들이나 운동권 학생들의 인권에 대해서 간섭했었잖아.”
“인권단체나 선진국의 말이라고 다 옳은 건 아니지. 그 나라의 상황에 맞는 법이나 제도를 도입해야지 어떻게 전 세계가 선진국의 기준에 맞추어 일률적인 방법으로 나라를 꾸려 나가누? 아까 얘기 한 것처럼 선진국도 옛날에는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였고, 그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었을 것 아냐. 의사가 같은 병을 앓는 환자라도 환자의 상태에 따라 처방을 달리 하잖아. 감기라도 어른들은 아스피린을 두 알 먹는다면 아이들은 반 알 정도 먹여야 하는 것 아니겠어? 우리나라를 봐. 난 전두환을 절대 옹호하지 않지만 그 시절에 삼청교육대가 얼마나 많은 역할을 했는지. 이 나라에도 삼청교육대를 만들어서 싹 쓸어야 해. 그게 대다수 과테말라 국민들이 원하는 건지도 몰라.”
흥분한 형은 말을 계속 이었다.
“선진국 놈들은 후진국들이 적당히 후진국으로 살기를 바라는 거야. 그래야만 물건도 팔아먹고 싼 노동력도 쓸 수 있기 때문이지. 미국 놈들을 봐. 미국에 있는 히스패닉들이 아니면 미국은 당장 망해. 중남미에 어디 하나 제대로 된 산업이 있어? 과테말라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뭐가 있어? 인권 운운하는 국가들이 과테말라를 정말 도와주려면 범죄인들을 데려 가라고 해. 깨끗하고 넓은 교도소에 데려다 놓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마쇼’ 하고 교육시키고 좋은 음식 먹이라고 해. 어제 신문에 보니까 과테말라는 경찰력도 범죄자들을 다스릴 능력이 없고, 그나마 잡은 놈들도 다 썩어빠진 재판부가 풀어 주잖아. 이 틈에서 무고한 국민들만 죽어가요. 이걸 누가 책임질 거야.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잖아.”
사실 태환 형의 주장이 맞는 말이기도 하다. 과테말라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생각할 수도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 2월에 중미의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과테말라를 방문한 엘살바도르 소속 의원 3명과 운전기사가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고, 이들을 살해한 용의자로 현직 경찰관 4명이 검거되어 교도소 수감하였으나 교도소 내에서 피살되었으며, 담당수사국장은 해외로 도피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이 사건은 장기화 되었고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데, 과테말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대개 이렇게 전개된다. 현직 국회의원이 유조차를 탈취하여 자기 주유소에서 팔다가 적발되어도 도망가게 놔두고, 과테말라 북동부 지역에 활개치는 13개의 마약조직이 있음에도 이들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은 비밀 활주로를 이용하여 마약을 운반하기도 한다. 서부활극에 나오는 무법천지에 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많다.
사진 : 체포된 엘살바도르 국회의원 살해사건의 연락책 용의자 Montaña 3
우리 동포사회에도 2007년 10월 말에 동포 황철수(가명)씨의 납치 사건을 시작으로 해서 사건들이 계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태환 형의 말에 따르면, 납치되었던 황씨는 몸값 50만 불을 요구하는 납치범들과 밀고 당기는 협상 속에서 경찰이 개입된 것을 눈치 챈 범인들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인질을 순순히 풀어 준 것 같다는 것이다. 이어 2008년 1월 초에 Villa Nueva 지역의 봉제공장에서 퇴근하던 이곱단(여, 가명)씨가 납치되었고 마찬가지로 범인들은 50만 불을 요구해왔다. 아무도 인질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가운데 피를 말리는 협상이 숨가쁘게 전개되었고, 믿어지지 않게도 인질은 한 푼의 석방금도 지불하지 않고 무사히 풀려 나왔다. 두 인질이 잘 풀려난 것은 사건 초기부터 주재국 경찰력이 개입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포사회가 두 건의 납치사건으로 긴장이 채 풀리기도 이어 1월 중순에 동포 김평안(가명)씨의 실종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우리 대사관의 노력으로 관자놀이에 총을 맞고 사망한 그의 시체를 가까스로 찾아내었는데, 이 소식이 퍼지면서 동포사회는 순식간에 얼어 붙었다. 대사관은 연일 동포 언론을 통하여 교민들에게 신변안전 행동요령을 홍보하면서 카지노 등 야간에 위험지역에 출입하지 않도록 당부하였다.
동포사회는 사망자의 장례절차를 도왔고 유가족들이 달려와 장례를 치르는 가운데 1월 18일에 은행에서 예금인출하고 나오던 동포 김월자(여, 가명)씨가 강도로부터 뺨에 총을 맞고 대수술을 하였고, 그 다음날 마찬가지로 예금인출하고 나오던 다른 동포 이철상(가명)씨도 운전 중에 신호대기 하다가 허벅지에 총을 맞고 강도를 당하였다. 천만 다행히도 이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턱 수술을 한 김월자씨는 고막과 전정기관이 파열되었을 뿐만 아니라 턱을 제대로 벌리지 못하여 말과 음식섭취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고, 이를 지켜본 김씨의 친척 가족은 16년간 살아온 이 땅을 미련 없이 떠나 귀국해 버렸다. 이어 3월 중에도 동포 한 사람이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해 나오다가 총을 두 발을 맞았고, 이로 인해 신장 한쪽을 잃었다.
이 뿐만 아니라 수시로 동포들이 살해 위협과 금품을 요구하는 협박, 그리고 강도 등으로부터 시달리고 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공포를 모른다는 한다. 특히, Zona 1의 구시가지에 있는 Pueblito 상가에서 우리 동포들이 운영하는 옷 가게가 100여 개 있는데 이곳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자주 발생한다.
동포사회의 마당발인 태환 형은 소주잔을 들이키면서 우리 대사관이 과테말라 경찰청장, 내무부장관, 검찰청장과 법무부장관 등을 만나 사건들에 대한 철저한 수사, 범인 검거와 처벌을 요청하는 등 심각하게 대응하고 있지만 이러한 사건들이 우리 동포만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고,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였다. 하부구조가 우리나라와 같이 움직이지 못하며, 경찰도 어떻게 손을 댈 수 없을 정도일 뿐만 아니라 경찰 자체도 깊숙이 부패해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과테말라 새 정부는 치안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하여 노력하고 있는 듯 하지만, 과테말라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 즉 빈부격차 심화, 미 불법 이민자 추방, 경찰 당국의 제한된 자원과 비효율성 등으로 단기간 안에 치안 상황 개선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한다. 결국, 결론은 과테말라에서 거주하고 있는 우리 동포나 잠시 다녀가는 여행자 모두 신변 안전에 각자가 유의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각자가 밤늦게 돌아다니거나 카지노 등 위험지역의 출입을 하지 않아야 한다. 과테말라의 치안이 아무리 불안하여도 내가 조심하면 사고를 피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군부의 독재정권 시절에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다가 희생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가 얻은 경제발전은 그들의 희생의 값이 아닐 수 없다. 1960년대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60달러에 불과하였는데 당시에는 우리나라가 과테말라나 인도보다 가난한 나라에 속했다. 70년대 후반에 들어서 1,000달러에 이르렀고 올해에는 20,000달러를 넘어 섰다. 흔히들 그 당시에는 아무라도 대통령이 되었어도 이러한 경제발전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과테말라, 인도나 필리핀과 같은 나라를 볼 때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 같다고 태환 형은 경제에 초점을 맞췄다. 사실, 경제가 발전하면 범죄도 줄어들고 사회가 안정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눈부신 경제성장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과테말라의 상황과 크게 다를 바가 없고, 특히 우리나라는 이데올로기 문제까지 겹쳐 있고 지정학적으로 강대국 틈에 있어 나라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을지 조차 모르겠다고 비약하였다.
태환 형은 최근 박 대통령의 생가 보존협회장이 암살당했다고 하는 뉴스를 보았다며, 이제는 박 대통령의 공적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평가를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고 밝혔다. 당시에 지도자는 비전을 갖고 한 국가를 이끌어 가야 할 수 밖에 없었고, 자신의 희생을 담보로 하여 국가의 먼 장래를 위해 결단을 내렸고, 그것 때문에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 만큼까지 있게 되었다면서 세종대왕과 버금가는 지도자라고 찬양하면서, 언제 우리나라가 이렇게까지 잘 살아 본 적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최근의 지도자들이 박 대통령을 깎아 내리는 발언을 하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못났기 때문이라고 핏대를 세웠다.
나는 박 대통령의 경제성장에 대한 업적이야 이미 누구나 다 인정하는 것이기는 하나, 당시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이 될 수 없는 일이었고, 독선적인 정권연장과 그 후유증도 만만치 않아 정치적으로는 아직도 후진국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인권문제를 강조하였는데, 이것이 형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과테말라는 36년간의 내전을 치르면서 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는데, 1996년 내전이 끝난지 10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는데, 결과를 놓고 본다면 36년간의 내전과 내전 후에 치안부재로 죽어간 사람들은 우리나라 군부독재 하에서 죽은 사람보다 몇 갑절 많고, 앞으로도 과테말라에서는 끊임없이 죽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밥 먹고 등 따뜻할 때 얘기할 수 있는 화제거리며, 가난하고 무지한 나라에서는 자칫 민주주의라는 허울좋은 제도아래에서 국민들이 가난을 탈피할 수 없고 부패와 범죄로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은 과테말라나 중남미 다른 나라들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 교민들이 만나면 우스개 소리로 하는 얘기 중의 하나가 과테말라에도 삼청교육대를 만들고 범죄자들을 싹 쓸어 버리면 과테말라는 금방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테말라는 지정학적으로 미국에서 가깝고, 북미와 남미의 중간에 위치하여 교통의 중심지가 될 수 있으며, 기후가 좋고 관광자원도 풍부하여 경제발전 하기가 쉬운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을 주변 국가에 다 빼앗기고 있다.
최근에 만난 과테말라 실업가 호세 씨와 만난 자리에서 과테말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치안과 교육이라고 했더니, 호세 씨는 경제성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경제가 성장되면 치안은 저절로 해결이 된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결국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이지만 태환 형과 호세 씨의 주장이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 칠레는 우리나라를 모델로 하여 군부독재를 하였고, 아이러니컬 하게도 지금은 중남미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사회가 깨끗한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사진 : 과테말라 전역에 13개의 마약조직이 활동하고 있다.
이제 과테말라에는 지난주에 벌어진 마약조직 내에서의 총격전으로 인하여 마약조직간의 암투가 벌어진 것으로 보이며, 많은 폭력사건들이 마약조직과 연관이 있다고 하는데, 과테말라 정부가 이를 어떻게 장악해 나갈 수 있을 지가 자못 궁금하다.
인권과 경제발전은 어느 하나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이며, 인권은 경제발전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고, 경제발전에 중점을 두면 인권을 침해하기 쉬운 일이므로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는 어떻게 선택하느냐를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인권을 팔아서 경제발전이라도 이루었던 지도자들은 후세에 고마워 하는 후손들이 있을 수 있으나, 자신의 욕심만 채웠던 지도자들은 재임 중 아무리 허울 좋게 치장을 하였어도 권좌에서 물러 나는 순간부터 구린내가 나게 된다.
(2008년 3월 30일, 과테말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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